평등, 공정, 기회균등 - 지금 시대의 아이들에게는 없는 것들이다. 시골에서 학원 다니지 않아도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던 시대를 살았던 한 사람으로서, 이 시대의 아이들에게 안타까움을 넘어 죄책감을 느낀다.
진보 vs 보수, 전통의 대립구도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저 구도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깨지지 않는 구도이다.
진보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었던 두 사람.. 김영삼도 어찌 되었건 자기가 어릴 때부터 그렇게나 소망했다는 대통령을 해 먹었고, 김대중도 인고의 세월을 이겨내고 결국은 대통령이라는 절대권력을 쟁취하였다. 어린 시절 5공 청문회에서 처음 본 노무현 아저씨, “저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가 피식 웃고 말았는데, 정말 대통령이 되었다. 대한민국이 멋져 보였다. 노무현 아저씨 옆에 있던 문재인도 대통령을 했다.
보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여하튼.. 우리가 민주화의 대표 주자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모두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했던 동지들도 더 이상 권력에 저항하는 투사가 아니라 막강한 권력의 심장부에서 자신들이 꿈꿔왔던 일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신은 느끼고 있는가?
진보와 보수
세월은 그들을 하나로 묶어 버린 것 같다.
전두환, 노태우, 그리고 한때는 민주진영의 상징 중 하나였던 김영삼 정부까지. 이 시기에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는 운동권은 선(善)이고, 정권은 악(惡)이라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가슴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그 선이라 불리는 이들이 정권을 잡고서 우리나라의 대학입시제도는 이상하게 변해갔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밀어 넣었다.
공정과 기회균등을 잡아먹은 교육개악의 역사
각 정부의 업적(?)
김영삼 정부: 대학 본고사 폐지(1997년). 입시위주교육을 혁파하고 선진국형 교육제도 도입(하겠다곤 했지만, 한 건 없음). 로스쿨 도입 논의(도입은 2009년). 교육개혁 선전만 열심히 했지, 정작 한 건 없었던 시절. (김영삼 스러웠던 시절)
김대중 정부: 김영삼 정부가 선전하던 것들을 실행에 착수. 1999년 비교과교육 강화. 수행평가 반영. 하나만 잘하면 대학 간다. (교육개악의 선봉 이해찬, 단군이래 최저학력 이해찬 세대)
노무현 정부: 입학사정관제도 강행. 수능등급제 강행. 수시비중 대폭 확대. 당시 상황은 “강행”이라고 불리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제도의 도입에 이견이 컸음. (왜 그러셨어요?)
이명박 정부: 수능등급제 폐지, 대신 입학사정관제도에 대한 지원은 강화, 입학사정관제 100% 도입을 목표로 하였으나, 때 맞춰 터진 입시비리 문제로 성공 못함. (하고는 싶었겠지)
박근혜 정부: 학생부종합전형으로 변경. 입학사정관제의 보완이라고는 하지만 명칭만 바뀐 수준.
문재인 정부: 노무현 정부 시절 시민사회수석으로서 제도 도입파의 한 축을 담당. 수시비중 대폭 확대. 대통령 본인도 불공정하게 보일 수 있다고 비판하고 학생부종합전형 공정성 강화 방안 발표하였으나, 크게 달라지지 않음.
그렇게나 반미를 외치더니.. 결국은 미국을 따라 했다
이런 대입제도를 도입할 당시, 미국은 이미 계층 간의 이동이 힘든 귀족사회, 계급사회에 도달해 있었음을 그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미국이 왜 입학사정관제도를 도입했는지에 대한 음모론과도 같은 이야기도 들었을 것이고, 이 제도가 기여입학제로 고교등급제로 변질되고 발전(?) 되는 과정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 영국, 일본 이외에는 이런 이상한 제도를 시행하는 국가가 없음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 우리나라 모든 정부 부처가 새로운 제도를 도입할 때 “반드시” 하는 것이 바로 “해외사례연구“이기 때문이다.
미국 사회의 문제점, 미국이 왜 입학사정관과 같은 이상한 제도를 도입했는지,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반미, 독재타도를 외치던 사람들은 다양성과 창의성의 기치를 걸고 미국의 입세제도를 도입했다.
이미 권력의 울타리에 들어간 자신들의 미래를 위한 큰 그림이었던 것일까?
출발은 선의였으나, 어쩌다 보니 결과가 악마적으로 변했던 것 뿐일까?

아이 혼자서는 대학에 갈 수 없는 세상
내가 나온 고등학교는 지방의 평준화 지역 고등학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순 명이 좀 안되던 우리 반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유학 온 친구들이 서른 명을 훌쩍 넘겼었다. 학교 정문에는 서울대 합격자들이 열명 넘게 적힌 현수막이 걸렸고, 연고대 합격자는 숫자조차도 기재하지 않았다.
대학교 때 서울에서 반창회를 한 적이 있었는데, 식당 하나를 통으로 점령한 것이 고향에 있던 우리 반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우리 학교에 우등반 제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우리 반이 서울로 좀 많이 올라오긴 했지만, 다른 반들도 평균 20명 이상씩은 서울로 올라왔다.
지금 나의 고향은, 그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를 전부 다 합쳐도, 그 시절 우리 학교 하나에서 서울로 유학 온 아이들의 수에 미치지 못한다. 서울대가 아니라, 인서울 대학교에만 들어가도 현수막이 걸린다고 한다.
- 요즘 그 도시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의 지능이 옛날보다 낮아져서 인가?
- 그 도시 부모들의 교육열이 예전만 같지 못 한가?
- 지방 대학들이 엄청 발전해서 서울로 올라올 필요가 없어진 것인가?
- 굳이 대학에 가지 않아도 먹고사는데 문제가 없어졌기 때문인가?
-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들어갈 때 이미 다 결판이 나서, 서울로 갈 수 있는 아이들은 그 도시를 떠난 것인가?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는 할아버지의 재력과 엄마의 정보력과 아빠의 무관심이 필요하다”는 말이 언제부터 생겼는가?
옛날에는 내가 좋은 대학을 가려고 열심히 공부하면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할아버지 엄마 아빠까지 똘똘 뭉쳐서 대학을 보내 주어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입시컨설팅, 학종컨설팅, 생기부컨설팅, 학생부종합관리컨설팅, 수시입시컨설팅 등으로 불리는 수많은 컨설팅업체가 난무한다. 지인 중에 그 쪽에 있는 사람이 있는데, 요즘은 학교가 대학을 보내주는 것이 아니라 학원과 자기들이 대학에 보내주는 시대라고 한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관리를 시작해야하고, 늦어도 고1이면 결판난다고 주장한다.
더 이상, 아이들끼리의 공정한 경쟁은 없다

우리 아이들은 균등한 기회는 커녕 시작부터 기울어진 운동장 선다. 재력과 정보력과 권력으로 똘똘 뭉쳐있는 강력한 팀을 상대로 보통의 아이들로서는 혼자서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교도 벗어나기 전에 현실을 인식한다. 중학교에 가면 좌절하고 포기하는 아이들이 속출한다. 고등학교까지 올라가면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아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꿈, 미래, 성공, 목표 – 우리 아이들에게는 꼰대의 잔소리가 된 지 이미 오래다.
불공정 사회, 진보와 보수의 합작품
피켓을 들고 깃발을 들고, 진보를 외치고 보수를 외치는 사람들은 모르는 것일까? 외면하는 것일까? 우리 아이들에게서 평등과 기회를 빼앗아간 이 제도가 그들의 합작품이었다는 사실을.
진보라 불리던 이들이 개혁의 미명 아래 깃발을 내 걸었고, 보수라 불리는 이들은 굳이 이를 마다할 필요가 없어서 그냥 방관했다. 진보가 나서서 기득권을 지켜 주겠다는데 보수가 뭐 하러 간섭하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현대판 음서제도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아무도 바꾸려하지 않는다.
진보는 자신들의 화려한 미래를 잘 예측했고, 보수는 진보가 차린 밥상에 자신들도 밥숟갈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잘 간파했다.
오랜 옛날부터.. 진보와 보수는 둘이었고, 둘처럼 행동했고, 둘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느 때인가부터 그들은 하나인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에 진보와 보수가 아직도 있기는 한 것일까?
나의 눈에는 “자기 자식의 대학 진학에 또는 취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집단 한 묶음”과 “그 외 다수의 기타 한 묶음”이 있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당신은 아직도 진보를 외치고 보수를 주장하는가?
평등? 기회균등? 공정?
진보가 기획하고 보수가 묵인하여 죽여버린, 지금 시대의 우리 아이들에게는 없는 것들이다.
평등, 공정, 기회균등 – 우리 아이들에게 이것들을 다시 되찾아 줄 누군가가 있다면, 나는 그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투표할 것이다. 그가 진보라 불리든, 보수라 불리든, 제3의 다른 무엇이라 불리든.. 내 온 힘을 다해 그를 지지할 것이다.